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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09.12.20 16:14 - jETA


  나는 창문닦이다. 회사는 작지만 나름 큼직큼직한 건물을 닦는다. 3일에 1번꼴로 일하는지라 개인 시간은 많다. 하지만 그만큼 버는 돈도 적다. 보통 시간이 남으면 휴식을 가지거나 친구와 함께 달이 우릴 바라보다 무서워서 산 뒤로 숨을 때 까지 마신다. 뭐, 자주는 아니고 가끔, 가끔 그런다.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술이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다.

 

  지난주에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왠지 마누라가 채소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오리를 맵게 쪄내어서 밥도 두둑하게 먹었고, 출근하려는데 주머니에 돈도 찔러주는게 아니겠는가. 호사(好事)라. 출근길에 복권을 샀다. 학창시절부터 찍는 능력은 좋지 않아 자동으로 1장 샀는데. 3, 7, 16, 29, 33, 39. 그냥 보나, 더해 보나, 빼 보나 기분 좋은 숫자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닦아야 하는 건물은 세계 1위를 자부하는 카메라회사의 지방 사옥이었다. 총 45층이었고 난 옆면을 담당했다. 지루한 시간 라디오로 겨우겨우 견디며 한 층, 한 층 내려왔다. 44층, 43층, 39층, 33층, 16층.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담배연기를 맛보며 닦아내는데 한 남자가 내게 물었다.

 

- 모델 한번 해보실래요?

- 생각 없소이다.

- 그냥 지금처럼 일만 하시고 한 달 버시는 정도 받으실 텐데요?

- 얼굴 팔리는 일 일거 아니오.

- 아니에요, 그냥 지금처럼 계시면 돼요, 뒷모습만 나오실 거예요.

 

  그리고 오늘, 난 다시 그 사옥을 찾았다. 그렇다, 수락한 거다. 그래도 모델이라고 가장 깨끗한 작업복을 찾아 입고 긴장감에 맥주도 한 병 마셨다. 그래도 달님도 무서워 할 정도의 음주 경력이 있으니 문제는 없다. 내용을 물었지만 평소처럼 창문을 닦다가 회사 이름을 소리치란다. 이게 무슨 마케팅이 될까 싶지만 나야 돈을 거저 버는 것이니 시키는 대로 옥상으로 올랐다. 오른쪽 아래에서 찍을 거니까 약간 비스듬히 작업해달란다.

 

  밧줄을 내리고 의자를 걸고 평소처럼 앉아서 밀대를 잡았다. 26층, 25층, 어제 너무 과음을 했나보다. 돈 쉽게 번다고 좀 많이 달렸더니. 그래도 아무렇지 않는 것처럼 움직여야한다. 난 모델이니까.

  44층, 43층, 아, 아까 맥주를 마시지 말걸 그랬다.

  40층, 39층, 손에 힘을 꽉 주어야 할 것 같다.

  37층, 36층, 35, 34, 33… 니미, 밧줄이 완전히 고정되지 않는다. 의자도 살짝 덜컹덜컹. 아직 반도 못 왔는데 떨어지면 개죽음이다. 아직 마누라한테 결혼기념일도 챙겨준 적이 없는데, 애새끼들 술 먹을 나이까진 키워야, 아니 술은 빼고. 아무튼 창틀을 잡았다.

 

  - 비스듬히 계셔야 한다니까요 !!

  - 다시 올라가야 할 것 같소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밧줄이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밀대를 놓으려다가 창틀을 놓쳤다. 결혼기념일, 애들 얼굴, 친구 얼굴, 돔 페리농…… 아니, 아니, 정신을 차리니 난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아래층 사람들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손을 뻗고 오른쪽을 바라보니 빌어먹을 사진사 놈이 렌즈를 들이댄다.

 

  - 너 이 개새끼야, 내가 너 때문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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