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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09.12.20 16:10 - jETA


  나는 그저 하루하루 흐르듯 사는 영국의 청년이다. 소심한 성격에다가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어떻게 말하면 평범하다 말할 수 있다. 소심한 성격 탓에 친구도 많지 않은 나는 수업이 끝나면 조용히 집으로 향한다. 나의 몇 안 되는 취미, 사진. 그저 있는 그대로 담는 것에 의미를 두곤 한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의 손이 가방으로 움직이는 것은 사각 프레임 안에 내 주변을 가두는 준비다.

 

  4개월 전, 전쟁을 만났다. 4개월 동안 모두가 정지한 것 같다. 아니, 움직인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파괴의 손길. 난 오늘도 다양한 소음이 만들어낸 콘서트와 크고 작은 진동의 향연 가운데에 누워있다. 견딜 수 없이 감싸오는 공포라는 이름의 어두운 품에 안긴다. 덕분에 나는 겨우 5평 되는 방에 나를 가두었다. 전쟁이 예견될 때부터 오른 물가는 지금의 내게 언제 만들어 졌는지도 모를 딱딱한 빵 몇 조각과 상한 냄새가 나는 우유 약간을 남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용하다. 오랜만에 긴 시간동안 잔 것 같다. 물론 아직도 위에서 올라오는 쓴 물은 날 고통스럽게 하지만 몸은 한결 낫다. 문득 밖이 보고 싶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이 고요함을 축복해주기 위해 가방 속에서 카메라와 렌즈를 꺼낸다. 밖으로 나가는 길, 나의 바짓가랑이를 잡는 공포와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현관문. 길어만 보이는 다섯 걸음. 어색하게 걸으며 익숙하게 렌즈를 장착시킨다.

 

  탁하지만 밝은 하늘. 고요하지만 요란한 길. 잔잔하지만 폐허가 된 모습. 모순 된 모습에서 어딘가 편안함을 느낀다. 문득 시간을 보려 왼손을 들어보았는데. 오전 12시. 이제 막 새로운 하루가 시작 된 참. 초침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아직 시간이 흐른다는 것에 조금 놀란다. 알 수 없는 자신감에 계단을 내려간다.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커지는 콘크리트 덩어리들. 분명 수십 번 짓밟았을 이 땅바닥은 오늘 처음 보는 것 같다. 천천히 골목길로 걸어 들어간다. 좁은 골목은 음식 썩는 냄새로 나를 반겨주고 난 코를 쥐며 화답한다. 도둑고양이조차 배를 곯아 발톱이 아스러지고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골목에 반향을 일으켜 오케스트라를 이룬다. 좁아서 길어보이던 저 곳, 끝이 보인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걷는다. 나는 시간을 걷는다. 그런 나를 좇는 것 같던 소리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내용물 없는 초록빛 토사물 위에 주저앉았다. 탄성. 라디오가 힘껏, 조심스럽게, 힘껏, 조심스럽게, 힘…껏, 외친다. …공격 중단. 회담…. 종전…. …협정. 우선 다급히 일어나 집으로 향하는 방향을 바라 본 순간, STOP. 멈칫. 아직 사람들은 없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고, 시간도 멈췄다. 환호성이 가까워지기 전에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의 고요한 외침을 네모진 세계에 담는다.

 

  틱, 탁, 틱, 탁, 내 귓가엔 손목시계의 소리가 무겁게만 들린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려는 순간,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 사람들의 소음. 문득 시간을 보려 왼손을 들어보았는데. 오전 12시 25분. 이제 막 새로운 하루가 시작 된 참. 초침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아직 시간이 흐른다는 것에 조금 놀란다. 틱, 탁, 틱, 탁, 내 귓가엔 손목시계의 소리가 무겁게만 들린다.

 

  나는 이 자리에 서있지만 시간은 간다. 내가 걷기에 시간이 흐른다고, 나는 시간을 걷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끝이라 정의하고 시작이라 이르는 모든 것들도 사실은 의미가 없다. 그저 흐르는 시간 위에 선을 긋고 시작이라는 오만한 생각. 시간은 전부터 흘렀고 앞으로도 흐를 것이다. 시계를 보는 자세 그대로 오른손에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짧은 섬광이 거리를 비추었다. 나는 조금 오만하다. 그래서, 지금은, 시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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